퀸스 갬빗(The Queen's Gambit)과 우아한 페미니즘
퀸스 갬빗을 시작했다. 저번 달까지 제출했어야 할 학회 논문 투고도 다음 학회로 미루고 퀄 시험과 영주권에 대한 포스팅도 뒤로 미루고.. 솔직히 코로나로 그렇게 타격받은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박사과정 학생 나부랭인데 왠지 코로나 이후로 뭔가 일이 잘 안된다.. 왜지?!
어쨌든 퀸스 갬빗을 보는데, 보는 내내 감탄이 나오는 작품이다. 물론 웬만한 드라마 및 영화로부터 다 나름의 매력을 찾으며 재미없어도 재미있게 보려고 하는 나지만, 이 작품은 빼어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전개, 주인공과 시청자가 간접적으로 겪는 적당한 긴장과 고난, 그리고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와 영상미. 그렇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이 드라마가 메시지 - GCDA - 를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우아하다는 것이다.
배경은 60년대, 아직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이 개화하기 전의 미국이다. 주인공 베스 하몬은 어릴 적 고아가 되었는데, 보육원으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우연한 기회로 체스를 접하게 된다. 코넬대에서 수학과 박사학위를 받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천재적인 두뇌 덕분인지, 단번에 주(state) 챔피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대표 선수가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체스계의 절대 강자인 러시아(당시 소련) 대표마저 이기는 스토리.. 일 것 같다. 아직 중반이라 결말은 모르겠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메시지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은 협심의 중요성과 페미니즘이다. 주인공은 상처가 많고 독립심이 강해 타인의 호의 또는 도움에 익숙지 않은데, 전(ex) 주 챔피언과 전 미국 챔피언에게 많은 도움 - 체스뿐 아니라 애정을 포함한 여러 인간적인 면들 - 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휴머니즘이 상당하다.
또, 주인공은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러 무례한 일들을 겪게 된다. 학창 시절 친구들의 행동들은 아직 어린애들이니까.. 하고 백 번 양보해 넘어가준다고 쳐도.. 미국 챔피언이 된 후에도 한 기자가 '체스를 하기엔 너무 매력적이다(glamorous라는 단어를 썼는데 중의적으로 여성인 주인공을 향한 안 좋은 어투를 담은 듯하다)'고 언급한 때에는, 시청자인 나조차도 부끄러움이 밀려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여기서 밀려왔던 부끄러움은, 드라마의 배경으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완전한 형태의 양성평등을 이루지 못한 이유의 대부분이 남성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이기심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도 그 기자와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서 기인했다.. 드라마의 전개는 여성인 주인공의 시선에서 진행되지만, 남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충분히 그녀의 상황이 공감되고 그 많은 부조리들과 시선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던 것인가를 느끼게 해 준다. 그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그러한 남성 위주의 사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전해지는 페미니즘의 메시지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 주었다.
나로선 어머니와 9살 차이의 누나, 학창 시절 마주쳤던 많은 친구들, 그리고 굉장히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인 현재의 장모님과 처제를 거쳐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에 대해 평균 이상 정도는 알고 있고, 그것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내가 그나마 바람직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런데 퀸스 갬빗을 보면서 그 메시지의 우아함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재작년,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한국에서도 미투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떤 친구가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른 일부 남성 집단과 여성 집단이 서로를 비난하는데, 그 남성 집단을 포함하여, 한국에서 벌어지는 미투 운동 등의 페미니즘 활동을 비난하는 남성들은 시대에 뒤쳐지고 생각이 짧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열을 올렸다. 나는 의도치 않게 그런 남성들을 대변하는(?) 입장이 되어 '아무리 좋은 개념이라 할지라도 너무 극단적인 방식으로 주장하면 부작용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지 않나. 예를 들어 0.1%라도 무고의 피해자가 되면 그 피해자는 회의감이 들 것이고 그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지 않나'라고 했다가.. 이래서 이과가 안 되는 거라며... 이과는 알 수 없는 문과의 세계가 있으니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강한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서는 그 천장의 강도를 뛰어넘는 힘으로 쳐야 하는 것이고, 비슷한 논리로 페미니즘이 급진적인 형태로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게 된 사람들 모두를 혐오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그 사람들이 무식해서, 무지해서, 시대에 뒤쳐져서..라고 비난하기에는.. 그중에는 분명히 평범한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물론 내가 우아하다는 형용사를 붙이긴 했지만, 내가 퀸스 갬빗을 통해 우아한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느꼈다고 해서 '우아하지 않은' 페미니즘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모든 페미니즘은 옳다! 하지만 너무 급진적인 방식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회의감을 갖게 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만 하게 되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지 않을까.
여기서 한 예가 더 생각난다. 작년인가 장모님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정말 뒷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충격적인 얘기였는데, '세계에서 성범죄가 가장 많은 비율로 일어나는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그 이유는 한국 남자들의 유전자가 이상해서'라는 주장이었다.... 장모님께서는 이 얘기를 미주 한인 주부 카페에서 보셨다고 했는데, 성범죄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비율로 일어난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사실인 듯했다. 나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장모님께서 한국 남자들의 유전자가 이상하다는 주장까지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계셨다는 것이다. 내가 그 통계에 대해 듣고 생각난 것은, 전 세계에서 성적인 것으로 가장 폐쇄적인 나라는 의외로 중동의 어느 나라가 아닌, 바로 우리나라라는 것이었다. 즉, '한국이 가장 성적으로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다'라는 것인데, 200여 개국을 다 조사해서 나온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왜냐하면 '공중파 방송에서의 성적 컨텐츠 규제/인터넷을 통한 포르노 사이트 불법/성매매 불법/아프리카 등의 스트리밍 서비스에서의 성적 컨텐츠 규제/심지어 웹툰에서도 성적 컨텐츠 규제'를 모두 시행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는 것을 접한 적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여 개국을 여행해 본 나로서는.. '확실히 우리나라가 아무리 변했다고는 하나 세계적으로 봤을 때는 가장 보수적이긴 하구나!'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처럼 우리나라가 성적으로 폐쇄적인 데다가, 규제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법에 저촉되는 부분이 많아서 통계적으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닐까요?'라고 했으나.. 장모님의 생각은 확고했다. 아니 도대체 어떤 유전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셨던 걸까.....
여기에 이어서, 장모님께서는 '90%의 한국 남자들이 성매매를 경험했다'라는 주장을 하셨는데, 그 근거는 이렇다. 어머님께서 알고 지내는 한국에 있는 친구분들/카페 글/재미 한인 교포들 등의 많은 하우스와이프 커뮤니티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너무 충격적임과 동시에 슬펐는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접대 문화라는 핑계 등으로 그러한 불법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생겨난 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알고 지낸 친구가 500명이라고 하고, 그중에서 정말 모든 얘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50명이라고 하면, 그 친구들 중에서는 성매매를 경험한 친구가 없다! 그래서 '저는 진짜 90%는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다가.. 내가 그런 얘기를 할 만큼 친한 친구가 없거나 왕따여서 그런 걸 경험한 친구를 못 만나봤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내 주위의 사람들 만으로 전체의 통계를 낼 수는 없다. 하지만.. 90%의 한국 남자를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은.. 정말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급진적인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동시에 위험성과 반발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여자와 남자는 결국 공존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물론, 가장 좋은 접근은 모든 남성들이 진정으로 페미니즘을 깨닫고, 과거 - 본인이 없던 시대의 상황일지라도 - 를 부끄러워하고, 정성적으로든 정량적으로든 모든 것들을 평등하게 맞추면 될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마음을 다치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발생한다면, 적어도 그 사람들을 포용해줄 수는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 사람들도 평범하고 평등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 추가
에피소드가 7개밖에 없어서 벌써 다 봤다. 결말까지 완벽하다. 물론 의지하던 green pills (초록색 tranquilizer 약)를 버린 것이나, 스스로의 힘으로도 천장에 체스판을 visualization 할 수 있게 되는 흐름은 다소 뻔했으나,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아마 green pills는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코르셋"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주인공은 결국 자신을 억압했던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그녀 스스로 승리를 쟁취하며, 그녀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완벽쓰..